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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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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이가서

 

 

 

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나?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간만에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속도 모르는 옆지기는 더위 먹었다고 합니다. 변소 안의 수문댁 그 눈꼬리로 오른 입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잠시 더위를 잊은 고마운 시입니다.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하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세상 참 퍽퍽합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제 밥그릇 챙기기 힘든 세상이니깐요.. 그런 세상에서 쉽게 끓는 사람은 부끄럽고 쑥스럽고 미쳐 보입니다. 다산 선생이 <증문>에서 지긋지긋한 모기를 노래했듯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쑥스럽지 않은 세상이라면,,, 시인 정양의 마음이 제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이곳에 수록된 시 전부를 베끼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표지의 사진을 특히 좋아해서 덜컥 집어 든 책인데 김기찬의 구수한 골목길 사진과 함께 힘들고 고달프고 때로는 가슴 따뜻한 시로 위로받을 수 있는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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