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자서전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선근 옮김/지만지고전천줄
요즘 한국사회는 '힐링'이란 말이 유행하고 상품화된 사회입니다. 힐링을 사고파는 사회죠. 힐링을 필요할 만큼 우리 사회가 아프다는 반증일 텐데 많이 누리는 사람도 적게 누리는 사람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도 아프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러한 아픔에 질적인 고하가 있을까 싶지만 '앎'이 수반되면 좀 더 고차원적으로 필연적 아픔을 수반합니다. 그러한 소위 고퀄의 아픔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치유책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 때문입니다.
누림이 클수록 더한 것 같습니다. 누리지 못하는 쪽이 나눔에 더 앞장서는 모습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고 누리는 쪽이 늘 누림에 배고파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이러합니다. 대체로···. 그래서 그들은 소위 '힐링'이라는 이국적 수사를 진통제 삼아 불편함을 달랩니다. '이만큼 힘들었는데 이러저러하게 극복했다'라는 내용을 문학적 수사를 곁들여 잘 포장된 힐링서적으로 지금의 아픔을 잠시 달래고 불편함을 희석하는 거죠. (하지만 어떤 책들은 독자가 지금 너무 힘들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펼쳐 들었다가 좌절감만 심어주기도 합니다. 글쓴이의 잘 다듬어진 텍스트로 부풀린 아픔과 진정성은 정말 아픈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가볍기만 합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사티하그라하 운동의 창시자 간디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종종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간디에 대해 언급하곤 했지만 실제로 아는게 없어 일종의 책임감으로 독감으로 고생하면서도 몇 페이지씩 꼬박꼬박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출생부터 사티하그라하 운동이 확대되면서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까지 그가 진리를 찾아 실험하고 경험했던 일들을 회상한 글이 옮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서 희미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뭔가 뚜렷해지면서 불편함에 힘이 빠졌습니다. 서두에 길게 주절거렸던 누리는 사람의 불편함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간디 스스로 말하고 있는 그의 행보와 위대함만 답습한듯 합니다.
한 번의 강연에 40~50만의 군중이 모이고 사람들은 그의 옷자락을 스치거나 손을 잡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고 용기를 얻었으며 먼 데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의 축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시인 타고르가 마하트마(위대한 혼(魂), 즉 성인(聖人))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로 간디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 정화는 삶의 모든 면에서의 나는 완전한 순결을 위해 항상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삼중정결(三重淨潔)을 내 속에 갖지 못한 것을 안다. 세상의 칭찬도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종종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라고 회고하는 대목에선 감히 붓다에 근접한 인물이라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네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마음속의 티끌 하나에도 아파했던 간디,,, 결국 너무 멀리 그리고 높이 있는 셈입니다. 자서전의 내용만을 놓고 보면 말입니다.
간디는 이 책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가능한 것이면 어린이에게도 가능하다는 신념이 내 마음속에 자라났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진리 탐구의 방법은 어렵다면 어렵지만 또 쉽다면 쉽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한없이 어렵겠지만 천진한 어린이에게는 아주 쉬워 보일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는 흙보다도 더 겸손해야 한다." 그의 탐구는 저에겐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실체 없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결국 무(無)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 멀리 있음이 이 세상 떠나기 바로 전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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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된다면 인도사람들이 생각하는 간디의 두 얼굴에 대해서도 살펴볼까 합니다.
조금 찾아보니 어두운 면이 많은 인물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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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절판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