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동문선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되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롤랑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란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필자 또한 구글링을 통해서 얻은 지식에 한계를 느껴 결국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은 지는 꽤 됩니다. 보통은 책을 읽고 하루 정도 정리를 하고 서평을 남기는데 바쁜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끼적입니다.
이 책 《밝은 방》은 "사진에 대해 어떤 '존재론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프랑스 사회학자인 롤랑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을 변증법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을 정리하여 기록한 노트입니다. 밖에서 볼 때 숲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처럼 손택이나 벤야민등과 마찬가지로 사진가가 아닌 사회학자나 평론가가 현상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사진'은 비교적 객관적이면서 시대주관적이라 제법 흥미롭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사회적 현상은 당시에는 이런저런 평론이 나오고 규명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지만 지나고 보면 본질과는 거리감이 있는 현상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진을 찍는 자'보다는 '찍히는 자'이며 '구경꾼'에 가깝습니다. 사진을 찍는 자는 부자연스러운 연출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찍는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은 전체적으로 불투명하고 모호한 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얼개 속에서 찍는 자를 배제한 채 자연스럽게 찍히는 자에서 구경꾼으로 옮겨갑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나는 사방에서 사진들을" 보고 "내가 요구하지 않는데도 세계로부터 나에게 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미지들'에 불과하고, 그것들의 출현 방식은 제멋대로 오는 식"입니다. 혹은 제멋대로 사라지는 식"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는 우리는 모두가 구경꾼입니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주체죠. 롤랑이 적은바 미국을 필두로 줄 선 나라의 사회 그 자체가 믿음보다는 이미지로 소통합니다. 이미지는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닙니다. 의미 없는 무수한 사진을 저자는 일종의 공해로 취급하고 있는데 아래에 옮긴 대목에서 이미지 홍수에 대한 그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사진들은 그 반대로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잡초처럼 증가하는 것만 보아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 심지어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내가 사진을 혐오하는 순간들이 있다. (예 이름들만 인용한다면) 외젠 아제의 고목 사진, 이에르 부셰의 누드 사진, 제르멘 크릴의 이중인화 사진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확인했던 것은 결국 내가 동일한 사진 작가의 모든 사진들을 다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
그렇게 저자는 혐오스럽기만 한 무수한 사진 속에서 저자에게 눈길을 끌거나 아주 드물게 순간 상처- 흔히 말하는 상처는 아닙니다 - 을 남기는 사진들에 집중하게 됩니다. 특히 기호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저자는 그러한 사진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호함을 정리하기 위해 라틴어에서 따온 꼬리표를 달아주는데, 전자는 스투디움(studium) 그리고 후자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명명합니다.
스투디움은 다소 보편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때로는 관계, 의례 등등 그 어떤 이유에서든 잠시나마 관심을 유발하는 모든 사진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어떤 설명으로도 규명할 수 없지만 아주 드물게 격렬하게 충격과 상처로 다가오는 그 무엇이 푼크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사진의 퀄리티에 상관없이 관심을 유발하는 모든 사진은 스투디움을 포함한 사진입니다. 푼크툼은 개개인이 다르고 한 장의 사진에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요소가 함께 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노출을 통해서 만들어진 환상적인 사진이 다소 충격적이더라도 그것이 사진작가의 테크닉임을 알기에 푼크툼이 될 수 없고, 우리가 이웃 블로그를 통해서 보는 모든 사진은 관계에 의한 스투디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모호함에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자 논리는 한동안 쾌속정을 탄 듯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기호를 자주 언급하는 것에 기호언어학의 관심이 사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어 논리를 흐리거나 혹은 본질에 이르는 자신 없음을 우려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실제로 <취소의 변>에서 스스로 달았던 꼬리표를 떼어버립니다(아이러니하게도 저자 스스로 떼어버린 꼬리표는 사람들이 더 강력하게 붙여버린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가 이걸 바라는 걸지도······). 들여다보면 이 책은 라틴어나 프랑스어 일본어를 사용하여 적잖은 기호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홀연하게 다가오는 깨우침과 같은 미묘한 감정에 일본의 '사토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각설, 흥미를 끄는 요소들 그리고 저자를 '찌르는' 요소에 대해서 논리를 이어가는 데 일단은 롤랑바르트가 언급한 유명한 그 기호에 대해 이해를 했으니 대충 목적은 이룬 셈입니다. 몇 가지만 더 정리해 봅니다.
필자 자신도 제법 긴 시간 동안 사진을 찍는 자였으며 또 열렬한 구경꾼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흥미를 유발케 하는 사진을 적잖게 보게 되는 데 - 푼크툼이 아닌 스투디움으로서 - 그 사진에서 느끼는 공통점을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콘트라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고급 승용차를 배경으로 청소하는 청소부 아줌마처럼 사회적인 지위의 고저나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시골과 도시, 여자와 남자, 어른과 아이, 밤과 낮 등등 하나의 프레임 혹은 두세 장의 프레임으로 구성한 대비되는 모든 구성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롤랑바르트는 필자가 붙였던 꼬리표와 비슷한 성격으로 '이원성'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KOEN WESSING: NICARAGUA" 1979
저자가 코엔 베싱이 1979년에 니카라과에서 촬영한 <도로를 순찰하고 있는 군인들>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폐허가 된 거리에서 철모를 쓴 두 명의 병사가 순찰하고 있다. 뒤쪽으로는 두 명의 수녀가 지나가고 있다. 그 사진이 내 마음에 들었던가?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이해한 것은 그 사진의 존재(그것의 모험)가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인 두 요소, 즉 병사들과 수녀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같은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조라는 용어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원성'이 좀 더 좁혀진 느낌은 있으나 굳이 이원성으로 한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 '콘트라스트'라는 용어를 버릴 필요는 없겠다 싶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논리는 저자의 어머니 사진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지극히 개인적이고 다소 철학적이라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고, 눈여겨볼 것이 사진의 본질 탐구로서 '분위기'와 '광기'가 '연민'으로 수렴괴 결국 사회에 의해 길들여지는 마지막 사유과정입니다. 이 부분은 따로 정리가 어려워 아래에 그대로 옮기며 마무리합니다. 결국, 이것이 저자가 사진이 발명된 후 반세기가 지나 사회 곳곳에 녹아든 사진에 대한 사유이며 그것이 갖는 사실성과 모호함이라는 이중성에서 방황하다 얻게 된 롤랑바르트만의 '사진의 본질'일 것입니다.
"사회는 사진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한 위험이 있는 광기를 완화시키고,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예술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사진가가 그림의 수사학과 순화된 전시 방식을 따르면서 예술가와 경쟁하고자하는 집요함이 비롯된다. 과연 사진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 사진 속에 아무런 광기가 없을 때, 그것의 노에마가 망각될 때, 그리하여 그것의 본질이 나에 대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말이다. 143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일반화시키고, 군서적으로 만들며, 평범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이 그것을 부각시키고 그것의 특수성.터무니없음.광기를 드러나게하는 비교 대상으로서의 그 어떠한 다른 이미지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사진은 횡포를 부려 다른 이미지들을 압도해 버린다. 그리하여 이제 사진상에 모델에 매혹된 (그리고 매혹시키는) 추종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더 이상 판화도 없고 구상화도 없다.
······
미친 것인가 현명한 것인가? 사진은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사진의 사실주의가 미학적.경험적 습관(미용실이나 치과에서 잡지들을 뒤적이는 것)을 통해 완화되고 상대적으로 남아있는다면 현명하다. 이 사실주의가 사랑의 두려운 의식에 시간이라는 글자를 되돌아오게 하면서 절대적이고, 말하자면 본원적이 된다면 미친 것이다. 사물의 흐름을 뒤바꾸고 내가 결국 사진적 황홀함이라 부르고자 하는 본질적으로 유도적인 움직임인 그시간을.
이상이 사진의 두 길이다. 사진의 광경을 완벽한 환상들의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진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완강한 현실의 깨어남과 대결한 것인가, 이것이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