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진화론
정봉주.지승호 지음/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성공의 고발자만이 실패의 정당한 판정자이다'
《레미제라블》
상대방의 전성시대에 끈덕지게 저항하지 않았던 자는 상대방의 몰락 앞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가 왜 나왔을까요? 역사의 교훈은 이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교훈을 주는 거거든요. 실제 상황은 그 사람이 성공할 때 침묵하고 있다가 몰락할 때는 자기가 마치 최후의 경멸자로서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을 물어 뜯어댑니다. "
말이든 글이든 정치 이야기는 참 불편합니다. 동생은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미리 손사래를 칩니다. '정치 얘기는 하지 마소. 싸움나네~' 하고 말이죠. 직장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네 정치!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인용했습니다만, 훗날 떳떳하게 침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모두가 침묵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적 현안에 대해 침묵하는 지식인들보다 공지영이나 표창원 이런 용기 있는 지식인들을 높이 사고 좋아하는 편입니다.
대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 뉴스는 꼭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챙겨 읽고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지라 애써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봉주 의원이 출소하고 한 인터뷰 <이희정의 사람, 이야기>에서 이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옥중에서 170여 권의 책을 읽고 60여 권의 책을 몇 번씩 재독을 했다고 하는데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정치인으로서 공맹 사상을 기반으로 사유를 통한 자기 성찰의 결과가 녹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고 배울 점이 적잖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몇 권의 민음사 고전과 함께 주문했던 책이 지난주에 배송된 후 제일 먼저 펼쳐 들었고 결과 이렇게 끼적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정봉주의 인터뷰를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말은 사족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돈하고 다듬으면 책의 두께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인터뷰 글이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오는 편이죠. 그래서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느낌을 적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제법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다독보다는 정독을 통한 사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독한 책이 다수가 되니 그의 말은 거침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광의의 대한민국은 국내외 석학들의 그것을 토대로 한반도 정세에 접목한 것들이라 일단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에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더 먼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에 수구 기득권층의 이해와 상충합니다. 그들이 눈앞의 이익을 버릴 수 있도록 전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가능합니다. 나꼼수와 같은 방식은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 남겨두고 정봉주 자신은 좀 더 광의의 정치를 위해 그만의 방식으로 활동을 예고합니다. 일단은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담론을 오프라인 카페로 확장할 방법을 모색할 듯 보입니다. 그의 목표는 전국 70여 개의 정치 콘서트가 가능한 카페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식 기부를 받아 강연도 하고 공연 및 자유롭게 토론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카페를 말이죠.
각론으로 들어가서 북한이 남침에 대해 사과 요구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본, 남북한과 중국이 EU와 같은 취지의 연합으로 상생할 수 있는 주장도 제법 흥미롭습니다. "유럽이 EU를 만든 근거가 20세기 들어서 1억 8,000만 명이 죽었는데,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하는 아픈 공감대에서 유럽이 연합을 만든 겁니다."라고 운을 떼는 데는 동북아의 아픈 역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뭐 이쪽은 사과하는 국가가 없기는 하지만, 여튼 실현만 된다면 정봉주가 인용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틀을 만든 1930년대 재무부 장관인 비그포르스가 말한 '잠정적 유토피아'와 조금은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정치에 진보 보수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죠. 보수가 진보를 만들고 사회를 분열한 이유가 잘 나타나 있고 게다가 우리나라의 보수는 미국의 '버번 스트래티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영호남 대립'과 '빨갱이 전략'의 치명적인 기제를 작동시킨다는 내용입니다. 그대로 옮겨봅니다.
"진보, 보수로 분열시켜 놓으면 권위주의적 위정자나 수구 집단은 통치하기 훨씬 쉬워요. 왜냐하면 사회가 분열되어 있잖아요. 보수의 지배논리는 이런 거거든요. 미국의 보수 집단이 사회를 지배하는 그 통치 전략을 그 이외 나라의 보수 집단은 그대로 배워 갑니다. 미국 공화당 보수 진영의 통치 전략은 이거죠. 분할 통치예요. 분할 통치인데, 어떻게 분할을 시키느냐 하면 미국 남부에 흑백 갈등을 조장합니다. 이걸 '버번 스트래터지(bourbon strategy)' 라고 해요. 위스키가 아니고. 17세기부터 프랑스를 장악하고 있던 부르봉(Bourbon) 왕가를 빗댄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국민을 분열시키는 건데요. 미국에서는 흑백을 분열시킵니다. 백인 하층민들을 약탈하고 탄압하는 것은 백인 부유층이거든요. 그러면 백인 부유층을 비판해야 되는데, 비판하려고 보면 흑백 갈등을 조장하니까 흑인들이 나쁜 거야. '저런 나쁜 깜둥이 새끼들' 이러고 수십 년 동안을 통치해온 거거든요. 그렇게 백인 하층민들이 백인 지배층을 공경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버번 스트래터지입니다.
이게 한국에 그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보수 진영은 보수와 진보를 나눠 놓죠. 그냥 보수, 진보를 나눠놓는 것뿐만 아니라 이분들에게 또 두가지 기제가 작동이 됩니다. 전라도 사람들과 영남, 영남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아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것이 영남의 지배층인데, 그쪽을 공격하고 거기에 반대되는 표를 던져야 되는데, 그걸 하려고 하는 순간 전라도를 공경해야 해요. 전라도 사람들이 나쁜 거야.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서 그게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누군가 하는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요. 1995년에 지방자치가 부활되고 난 다음에 16개 시.도 중에서 가장 발전이 덜 된 지역이 대구에요. 대구의 서민들은 대구의 새누리당 지배층을 공격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공격을 못해야. 전라도를 공격해야 되니까. 그래서 정신 차리고 나서 공격하려고 하니까 또 빨갱이가 나오는 거예요. 한국 보수의 지배 전략은 보수, 진보를 나눠놓고 여기에 치명적인 기제를 작동시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영호남 대립'과 '빨갱이 전략'입니다. 이 기제 속에서는 이기기가 힘 든 거예요. 103-104쪽"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빗대어 말한 '모두 다 서서 야구를 보는 사회'입니다. 경기를 더 잘 보기 위해 야구장 중간에 한 사람이 서게 되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니까 일제히 다 서서 본다는 내용인데, 모두 서 있는 경기장에서 혼자만 앉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앉지를 못합니다. 이럴 때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서 모두 앉아서 보면 편안하니까 앉으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앉는다는 것의 실체는 미국식 탐욕의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을 버리는 것으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이 '시험 철폐'라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개인의 무한 경쟁 체제를 깨지 않는 것, 대학이 입학사정관제를 통해서 특목고 출신의 부유한 아이들, 계급화된 아이들을 뽑아내는 이유가 보수 진영의 재생산 구조를 계속 가져가"려는 대한민국의 현실 때문입니다. "철저히 계급적 이해가 반영된 교육 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20~30년 동안 계속되면 궁극적으로 국가는 몰락하는 길이라고 설파합니다. 나아가 경쟁이 아닌 협업으로서 품앗이나 두레 공동체로의 회귀도 함께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도올선생의 제자가 된 사연을 소개한 <도올 선생과의 소중한 만남> 편을 비롯하여 비정규직 문제, 3차 산업혁명, 박근혜 당선 배경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 등등 넘칠 만큼 꼼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도올 선생과의 주고받은 서신은 제법 인상 깊었는데 저 또한 '도올'의 위대함에 공감하기에 제자를 두지 않기로 유명한 도올 선생님이 제자로 인정한 것도 뜻밖이었고 그만큼 더 정봉주의 그릇이 커 보이기도 했습니다.
국민이 정봉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극명하게 나뉩니다. 나꼼수 애청자라면 호(好)일 테지만 불호(不好) 입장의 사람들은 그의 본 모습은 보지 못하며 가볍고 막 나가는 정치인으로 치부합니다. GO발 뉴스의 이상호 기자가 "비포 정봉주는 애프터 정봉주와는 다를 것이다"라고 말하듯이 더 깊어진 정봉주가 그런 건너편에선 그들까지 이해를 시킬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를 주목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옥중에서 도올 선생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속 그의 다짐을 옮기면서 두서없는 서평 나부랭이를 가름합니다.
경쾌하되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진중하되 권위에 의존하지 않겠습니다.
심사숙고하되 우유부단하지 않겠습니다.
결단 있게 행동하되 조바심내지 않겠습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과 성선(性善)의 철학을 늘 마음에 품겠습니다.
[책속의 책]
공지영의 《의자놀이》
도올 《맹자, 사람의 길》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빅토르 위고《레미제라블》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윤태호의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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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주차 <반디 & View 어워드> 선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