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천명관 지음/문학동네
띠지에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책장을 넘긴 속도,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카타르시스에 띠지의 글이 빈말이 아님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저자 '천명관' 이름 석 자가 제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비슷한 향기를 어렵지 않게 맡을 수 있었는데 현실과 설화의 교묘한 조화와 한 명도 소홀히 하지 않는 인물들의 관계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의 짧지 않은 시간의 웅장함에서 그 향기는 더 짙어졌습니다. 다만 저자가 직접 '그것은 노벨문학상의 법칙'이라고 말한 것 처럼 책을 덮고 받은 충격과 허허로운 감동과 풍기는 아우라는 《백년 동안의 고독》이 훨씬 우위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필자가 《고래》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는 우리 말로 씌여 졌다는 점입니다. 번역본에서 느낄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소위 막걸리와 같은 걸죽한 단어들을 벌컥대며 갈증을 해소하는 느낌이 새롭습니다. 온갖 고상한 단어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그러한 단어들에 목말라 있었다고 할까요. 또한 이 책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행동에 우리 주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온갖 법칙 - 자연, 소문, 관성, 유전, 사랑, 중력, 화류계, 가속도, 무지, 등등 - 의 사례를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옛시의 딱 떨어지는 운율처럼 리듬감 있게 파고드는 법칙들은 제법 긴 분량을 지치지 않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추임새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앞서 언급한 '법칙'에 이어 또 하나의 재미가 곳곳에 녹아있는 정치·사회적 풍자를 읽는 재미입니다. "남자가 되고 악덕 기업주가 되고 결국은 이기심과 치졸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속 좁은 사내가 된" 금복의 말 중에 "나는 오른쪽을 택했어요. 왜냐하면 오른쪽은 옳은 쪽이란 뜻이니까" 라는 말로 대변되는 금복의 정치 신념은 무릎을 탁! 하고 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복잡한 얘기지만 우리 사회에서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비슷한 대답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책은 결국 하나의 단어 '욕망' 즉 인간의 욕망으로 귀결되고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캐릭터가 금복입니다. 우리는 금복을 통해서 돈의 법칙과 최후를 목도하게 됩니다. 돈의 생리를 몸으로 느끼고 있던 금복은 하는 일마다 성공하지만 '만족'이라는 단어는 돈과 남자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자를 넘어서서 남자가 되었고 남자의 생식기 - 이 소설의 특징인 약간의 판타지 힘을 빌려 - 도 갖게 되지만 멈출 수 없었던 금복을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죽음이 막아서게 됩니다.
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춘희는 말할 것도 없고 초인적인 힘을 가졌던 걱정과 한 여자를 위해 인생을 살다 금복에게 죽임을 당한 '칼잡이'에서 부터 文이 그렇고 쌍둥이 자매와 코끼리인 '점보' 금복에게 어찌 되었건 씨드머니를 제공한 노파와 그 딸인 벌을 부리는 백발의 애꾸눈 등 소설 속 캐릭터들은 한 명 한 명 그 존재감이 적지 않습니다.
산골에서 바닷가로 집을 나와 처음 보았던 커다란 고래가 결국은 금복의 욕망이었던 걸까요?《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콘도'와 비슷한 무대인 '평대'라는 지역이 금복에 의해 흥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훗날 춘희가 쉼 없이 만든 무수한 빨간 벽돌만이 남아 후세에 튼튼한 극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욕망으로 점철된 금복에 비해 그와 걱정 사이에 태어난 춘희가 그토록 벽돌을 만들었던 까닭은 과연 무얼까요? 아마도 춘희는 끊임없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던 《나무심는 노인》의 그 마음과 조금은 일치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무리하면서 소위 '재미'있는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에게 가뭄에 단비처럼 그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소설이기에 강력하게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