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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ketch

[서평]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 바스러져서 가루로 흩어지는 것들을 애써 붙잡다...

글: HooneyPaPa 2019.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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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문학동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들을 써본 적이 없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작가의 말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김훈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당연 '허허로움'입니다. '김훈'이라는 이름만 보고 거부감 없이 집어 든 책 《내 젊은 날의 숲》은 늙고 바스러져서 가루로 흩어지는 것들을 애써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속 깊은 곳에서부터 허해집니다. 어쩌면 그런 먹먹함까지도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 허허로움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알려진 유명인사 특히 열렬한 독서가로 알려진 사람 중엔 고민거리가 많고 마음이 복잡할 때는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내공의 차이를 절감합니다. 한동안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 산을 이뤄도 시간이 지나면 죽이든 밥이든 결론이 나지만, 막상 눈앞에 쌓여 있는 고민거리 앞에서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책을 집어 들었다가 미꾸라지처럼 사방에서 달려드는 생각들로 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숱한 생각들을 뿌리치고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는 책이 사람마다 따로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됩니다. 지금 제겐 김훈의 책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문체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에둘러 말하는 선문답 같은 그의 텍스트를 읽다 보면 어느덧 빠져들게 되는 자신을 봅니다. 저작하듯 천천히 음독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글들이지요. 음미하면 맛있습니다.

 

" 돈이 다 떨어지고,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던 그 구매력이 빠져나가면서 돈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인데,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세는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리 그 자체여서 거기에 약간의 속임수가 섞여 있어도 안정을 누리는 동안 그 속임수는 자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

 

특히 이 책에서 김훈은 세밀화를 그리는 화자인 연주로 분하여 민통선 안 자등령 숲 앞에서 자연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회화'에게 세밀화의 짐을 덜어준 지 2세기가 넘었건만 사진이 표현하지 못한 자연을 지금 김훈은 이 책 속에서 직접 붓을 들었습니다. 그 그림은 텍스트이고 그 텍스트를 보는 제 눈으로 흡입하여 눈앞에 완성된 그림으로 토해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펼쳐진 눈 앞의 세밀화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작은 힌트를 작가의 말에서 찾아 아래 옮겨봅니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 이 책에 씌어진 글의 대부분은 그 여행의 소산이다."

 

작가와 함께 연주의 아버지를 자등령의 숲에 모시고 책을 덮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몸을 감싸는 허허로움에 한숨을 쉬었습니다. 연(緣) 앞에 두려워 떨면서 맴돌 뿐 다가서지 못하는 화자(話者)가 낙엽 뒹구는 초겨울 제 맘 같아 한참을 책표지만 어루만집니다.

 

— 이 큰 나무가 새파란 잎을 달고 있으니, 이 나무는 젊은 나무요, 늙은 나무요?
— 나무는 늙은 나무들도 젊은 잎을 틔우니까 한 그루 안에서 늙음과 젊음이 순환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지요.
— 아, 그렇겠군요. 그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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