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책
최은희 지음/낮은산
법정 스님은 쉽게 읽히는 책을 경계하라고 하셨고 아동문학가 故 권정생 선생님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불편'이라는 단어가 '좋은 글'임을 역설한다는 생각은 책을 본격적으로 포식하듯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생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자리잡아 이제는 집요하기까지 합니다. 이 책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책》을 펼쳐 든 싱거운 이유도 그 '불편'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충북 청풍에서 가난하지만 풍요롭게 자란 저자 최은희는 마흔을 훌적 넘긴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격동의 시절에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오월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시집은 내지 못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이후 "근 이십 년 그림책을 가지고 뒹굴며 놀"면서 조금씩 그리고 켜켜이 쌓인 그녀의 사유(思惟)의 결과물이자 소회(所懷)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는 만큼 보인다"에 대한 나의 인식은 확고했습니다. 인식(認識)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참 무섭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과정, 즉 인간의 인식 프로세스에는 일반적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불편함(!)을 걸러주는 일종의 보호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단계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뇌가 이해한 영역을 의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보호 메커니즘이 만든 프레임에 갇히게 됩니다.
사물이든 현상이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겨우 코딱지만 한 프레임인데도 애써 줄이고 줄여 그것이 전체이고 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좁은 프레임이 주는 편안함에 중독된 탓일 겁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은 불편하고 지난한 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호 메커니즘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존재가 불편해집니다. 괴변일지 모르겠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의 인식의 기저는 앎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그 불편한 존재를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지만 그 말은 맞으면서도 틀리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는 보려 하지 않고, 그래서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의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안다고 여기면 좀처럼 마음의 눈을 뜨지 않는다. 감긴 마음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감긴 마음의 눈,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우매함은 많은 것을 놏친다. 184쪽
여기서 저자의 불편함이 내게 옮겨집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앎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이 떠올랐고 그것이 딴엔 진리라고 여기저기에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확신에 찬 만큼 확신의 바깥에는 눈을 감았고 그만큼 많은 것을 놏쳤던 것 같습니다. 역시 아이러니합니다. 프레임을 키우려고 했던 어설픈 '앎'이 또 다른 프레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보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저자의 술회가 불편했고 고마웠습니다.
동료를 떠나게 하고 후배와 사이가 멀어지고 아들이 엇나갔을 과거의 자신은 - 당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 서리에 감이 농익듯이 그저 세월에 기댈 뿐입니다. 이런 저자는 수동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자신을 그림책에 애써 옮겨 놓습니다. 편안할 리 없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아이의 눈높이를 잊어버린 어른이 다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감고 있었던 마음의 눈을 뜨는 첫걸음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림책의 눈높이에 국한되지는 않을 겁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눈높이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월의 높이에 상관없이 대화하고 보고 싶은 것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끊임없는 능동적 사유가 핵심이며 혜안입니다. 책 속의 불편함은 저자만의 불편함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독자의 불편함과 닮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술회는 여러모로 불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