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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ketch

[서평] 이영미의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맥락화의 오류는 불편하지만 큰 흐름을 파악하기는 유익한...

글: HooneyPaPa 2019.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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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이영미 지음/두리미디어

 

 

언제부턴가 '세시봉'이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김세환, 송창식과 관련된 말인 건 확실한데 그 쉬운 인터넷 검색도 하지 않을 걸 보면 당시 제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세시봉이라는 간판을 내건 호프집이 생겼고 그때야 꽤 인지도 있는 말인가 싶었고, 알고 보니 '매우 좋다'는 뜻의 불어로 70년대 서울에서 지식인들이 모여 대한민국 포크를 이끌었던 음악감상실이라고 합니다. 그 시대 대중음악을 이끌었던 포크의 함축적인 의미입니다.

 

 

돌이켜보면 올림픽이 열렸던 중학생이었던 시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커다란 모노 녹음기로 녹음해서 가사를 적고 따라 부르며 노래를 배웠습니다. 당연히 당시 그 노래가 포크인지 알 리가 없지요.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골이기도 했지만, 취향이 그저 부르기 좋고 멋스러운 리듬만 있으면 어떤 가사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적잖은 노래를 알면서도 가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도 모르는 가수가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것이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그렇게 불렀던 노래가 우연히 나올라치면 옛날 그 시절이 눈앞에 아른거릴 만큼 한 곡 한 곡 추억일 뿐입니다.


그런데 훌쩍 커버린 지금 돌이켜보니 세시봉의 전후 이야기는 상식이 되어버려 공부가 필요했고 그 노래 뒤에 숨은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이 책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를 보는 순간 끌렸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평소 대중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무겁지 않기에 이 책도 가볍게 넘겼습니다. 처음엔 말입니다.


저자 이영미는 대중예술사를 역사적 관전에서 풀어나가기 위해 '세대'를 서두에 화두로 꺼내고 있습니다. 크게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포크 세대를 중심으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라서 해방을 맞고 또 전쟁을 겪었던 트로트를 즐기던 '청년문화세대'와 92년대 서태지의 음악을 즐겼던 신대세로 분류하고 각각의 의미를 또 그런 음악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평소 이런 나누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나누면 쉬워지지만, 나중에 다양하고 복잡 다단한 현상을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는 맥락화의 함정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의 자주 범하는 우라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도 그런 맥락화의 함정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원하는 바는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불편하지만 괜찮은 책임을 먼저 밝힙니다.



식민시대 일본에서 건너온 트로트를 좋아했던 '청년문화세대'는 극도로 억압받았던 세대로 완전히 짓눌려 그 사회에 반기를 들지 못했고 이것이 민요처럼 시원스럽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그저 '내 탓이오' 하며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으며 "민요나 구전 가요는 지배권력의 공식적 통제 바깥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레코드와 상업적 공연으로 유통되는 대중가요는 지배권력이 보내는 감시의 눈길을 피할 방법이 없"는 본원적 한계 때문에 생겨났고 또 그 내에서 최대한의 몸짓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들면 트로트가 좋아집니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청년들도 살아보니 별 수 있나요.

"10대와 20대까지는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 거라고, 안 되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했지요. 부모들처럼 바보같이 살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30이 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늙은 부모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살아가게 되면서,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전혀 옳지 않은 짓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세상에 저항도 못하고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굴욕적이고 바보 같은데 어쩔 수 없습니다. 부당한 직장 상사의 강압에 찍소리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주잔에 울분을 털어 붓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심하게 공감을 해서 울컥해버린 한 대목입니다. 결국, 저자는 신파적인 상황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포크 세대는 어떨까요? 저자 이미영이 속해 있는 이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며 허리띠 졸라 자식 공부에 매진했던 지식인들의 시대였다고 합니다. 서울의 명문 대학 출신의 가수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주축이 된 음악이 포크인 셈이죠. "만들고 부르는 사람도 좀 잘났고, 그걸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대학생이거나 인문계 고등학생 이었"다고 합니다. 덜 상업적이었고 하고 싶은 얘기를 노래하는 인식이 생겼다고 합니다. 아버지 세대는 뼈 빠지게 벌어서 공부를 가르쳤더니 모여 다니며 이상한 짓만 하는 걸로 보였고 반대로 이들 세대는 기성 집권 세대의 부조를 목도하고 "민주화와 평등,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완전한 근대성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한" 세대라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1990년대 세대에게는 세상이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세상뿐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자기 자신조차 오염된 세상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 자신, 그리고 육체와 욕망입니다. 자기 안에 이기심이 있다는 것, 악마적 본성이 있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세대로 신세대를 낙인찍고 있습니다. 수긍은 가지만 신세대 주류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후 시종일관 비판한 서태지를 염두에 둔 말일지 모르겠지만, 저자도 기성세대의 눈을 가진 이상 어느 정도의 주관성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사견이지만, 서태지의 논평 청탁 건은 길게 언급한 것은 사족으로 서태지와 악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이후 서태지의 비평이 신빙성이 있음에도 '악연'이 자꾸 방해합니다. 그런데 제목은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니 제법 억지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여튼 가벼운 마음에 집어 든 책이 제법 사유를 이끌었음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각 세대를 주요 가수들의 성향이나 작품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익했고, 공감 가는 글귀도 적지 않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객관성이 부족해져서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대중문화를 평한 저자의 직업상 비판적인 글을 읽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요즘 주말이면 가수들이 다른 사람의 노래를 편곡해서 경연을 벌이는 <나는 가수다>와 <불명의 명곡 II>를 즐겨보는데 흘러간 노래가 제법 나와 보고 듣는 재미에 푹 빠져 삽니다. 조금 더 들리고 보이길 바라면서 졸평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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