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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ketch

[서평] 김영민의 《공부론》- 타자와의 소통 그리고 알면서 모른 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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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 지음/샘터사

 

김영민의 《공부론》이란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다 읽었느냐구요? 네 일단 완독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책장을 한 장 넘기는데 제법 힘이 드는 책입니다. 천천히 음독하며 집중하면 뜻이 보이기에 중도에 포기하고 픈 마음 간신히 붙잡고 마지막 책장을 넘겼습니다. 공부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철학적 질문에 대한 힌트를 이 책에서 얻고자 힘이 가장 컸고 거기에 약간의 지적 허영심이 부채질 한 까닭에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조금의 소득은 있어 이렇게 졸필이나마 끼적여 느낌을 정리해 두고자 합니다.


먼저 '슬럼프'에 관한 내용은 또 다른 블로그에서 조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https://mindeater.tistory.com/1605). 슬럼프의 양식에 투영된 자신의 재능이나 기량과 한계의 조건을 치열하게 깨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슬럼프는 스스로 물러남(심자통, 心自通)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영감은 오랜 경험을 부싯돌로 삼아 불꽃을 피우고, 좋은 생각은 언제나 갖은 이론 이후에야 느리게 찾아오는 진경이다."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꾸준한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생각을 하죠. 그런데 저자는 혼자서 생각만 거듭하는 공부는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며 일축해버립니다. 즉, "‘생각’이라는 유리방 속에 갇히게 된 자아는 무섭도록 자신만을 돌아보며, 단 한 순간도 타자라는 아득한 지평 혹은 심연에 발을 내딛지 않는 채로 자기-생각의 독창성만을 고집하는 허영과 자기-생각의 덩어리인 냉소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대화와 응대(소통)를 통해서 그 부자연스러움을 인지하는 것, 쉽게 말해 공부는 타자와의 어울림이 밑바탕이 되어야 공부라는 이야기입니다.


 "진지한 비용 치르기에 몸을 사리거나 쉽게 체증을 보이는 ‘구경꾼’들은 ‘생각’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구경을 일삼을 뿐, 자신의 생활이나 버릇을 매개로 개입하거나 개입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타자와의 말과 응대에는 진지한 비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지불하기 싫어 혼자서 끙끙대는 사람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구경꾼'이라고 말하고 공부에서 멀리 떼어 놓기까지 합니다.


책과 사유 그리고 타자를 통한 검증 이렇게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공부는 혼자서 한다는 생각이 컸기에 그러한 지적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모든 공부가 '엉덩이의 힘'으로 하는 건 아니기에 책이 기본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앎(의식)'으로 가는 노하우로 저자는 '알면서 모른 체하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알게 되면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 오죽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겠습니까? 그렇게 서둘러 말해버린 앎은 시간 속에 녹아든 무늬가 아니라 얼룩일 뿐이랍니다. 여기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생각을 경계하며 타자와의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말하지 말라니요...


 "앎(의식)은 제 스스로가 몸(무의식)에 가닿아 서로 조우한 뒤에 그 몸으로부터 앎(의식)의 이치를 회통시켜야 하는 일종의 절차 혹은 단계를 거쳐야 하기에, 몸(무의식)에 대한 적절한 배려나 고려가 없이 말이라는 형태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앎(의식)에 대해서라면, 몸(무의식)은 자기보호 기제를 작동시켜서라도 위험한 외부자극에 다를 바 없는 앎(의식)이라는 이물스러움을 차단하게 된다"고 덧붙이고 있는데 역시 모르겠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가 모호하고 말을 한다고 그렇게 배운 앎을 무의식이 차단한다니 말이죠. 무의식에 대한 배려가 없는 말이란 무엇인지부터 속 시원하게 듣고 싶어집니다.


종종 인용한 글귀를 보면 아시겠지만, 목적의식이 없고 집중하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물론 저와 비슷한 급의 독자에겐 말이죠. 공부란 이렇게 '권위' 가 있어야 하고 어려운 단어로 이야기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강호에서 활동하는 무림고수, 특히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독고구패의 무거운 현철검에 비유하고 싶어집니다. 독고구패는 훗날 무거운 그 검을 버리고 나뭇가지로도 무릇 적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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