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민음사
"국경의 긴 터널을 바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장마가 중부지방에 머물더니 내려갈 줄을 모릅니다. 흡사 동남아의 우기(雨期)와도 같은 끈적끈적한 날씨가 연일 이어집니다. 몸은 비에 분 것 마냥 힘없이 쳐지기 일쑤입니다. 나무그늘이 있는 개울에 평상을 놓고 누워 흐르는 개울에 발 담그며 책이라도 읽으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바쁜 일로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눈의 나라 《설국》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까지 달려있으니 금상첨화네요. 그리하여 무더운 날 소설 속 '설국'으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일단은 말이죠...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눈의 고장 설국에 도쿄에서 무위도식하는 여행객 시마무라가 여행을 오게 됩니다. 그 한적한 시골의 온천장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를 만나고 같은 열차를 타고 온 고마코 약혼자의 새 애인인 요코도 알게 됩니다. 시마무라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설국에서 그 두 여인에게서 덧없는 정렬을 느끼지만 그저 허무의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요코의 죽음으로 이어진 화재를 제외하면 그저 밋밋함의 연속입니다.
흔한 정사(情事) 장면도 - 솔직히 기대했습니다.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해선지 시쳇말로 낚인 기분도 들었습니다. - 없는 탓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한결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소설은 주인공이 따로 있습니다. 시마무라도 고마코도 그렇다고 요코도 아닌 설국 그 자체가 주인공인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해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설국』은 처음부터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다. 가와바타가 36세 때 쓴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문예춘추》, 1935. 1) 이후, 이 작품의 소재를 살려 단속적으로 발표한 단편들이 모여 연작 형태의 중편 『설국』이 완성되었다. 1948년, 완결판 『설국』을 출간하기까지는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
<단숨에 써내려 간 것이 아니라 생각날때마다 이어 쓴 것을 드문드문 잡지에 발표한> 작품인 만큼, 『설국』은 기승전결이 분명한 스토리보다는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와 주변의 자연 묘사에 상당 부분 치중하고 있다."
가와바타는 당시 "소설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이를 소홀히 한 결과로, 자연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 낡고 구태의연한 단어들만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소설에 그대로 반영된 가와바타의 노력의 결과물,, 즉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에 주목합니다. 옮긴 이 또한 "가와바타 특유의 감각적 표현과 문체의 결을 음미하는" 것이 『설국』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독자는 그저 문장의 흐름에 몸을 싣고 설국에 입성하면 될 일입니다. 시마무라와 동화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네요.
그럼에도 전 설국으로 가는 기차에 완전히 몸을 싣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며칠 동안 침상에서 잠들기 전 고마코와의 정사 장면만 기대하고 읽었으니 말이죠. 가와바타의 문장을 음미할 시간도 저작(咀嚼)할 시간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죠. 작품해설을 먼저 읽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게다가 서두에 인용한 글귀 말입니다. 일본 근대문학 전 작품을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일본어가 지닌 독특한 운율이 제대로 살아 있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과 더불어 어둑하고 긴 터널을 지나 막 눈부신 은세계로 나온 듯한 환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라고 옮긴 이는 해설을 달고 있습니다. 곱씹어보니 그런 것같습니다. 갑자기 의기소침해집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아우라 가득한 문장을 알아채는 내공을 쌓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말입니다... 독서내공 증진과 훗날 재독을 약속하며 짧은 흔적을 가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