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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ketch

[서평] 김훈 《남한산성》 - 내 약소한 조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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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지음/학고재

 

1616년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칸으로 우뚝 섰고 그로부터 20년 후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화친을 거부하고 숭명배금을 고수한 조선이 괘씸하고 명을 치기 위해 산해관을 넘을 때 배후를 칠 수 있다고 여긴 홍타이지는 중국 통일을 이루기에 앞서 조선을 복속시키기 위한 전쟁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입니다.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자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두 달 만에 스스로 걸어 나와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호령에 따라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도구(三拜九叩頭)를 행합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이며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치욕입니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https://ko.wikipedia.org

 

훗날 오랑캐의 나라를 국가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조선의 역사가는 전쟁이 아닌 호(胡)의 난(亂)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서로 대등한 정규전 성격의 전쟁이 아닌 호인(胡人)들이 상국(上國)인 조선에 일방적인 반기를 들고 침략해 들어온 것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도 같은 맥락입니다. 병자년의 치욕을 인정할 수 없는 고집스움인지 조선과 명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당한 패배라서 인정할 수 없음인지 제 짧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치욕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 길이 없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엔 삼전도비 훼손사건이 있었습니다. 참담한 심정이야 이해가 갑니다만 해를 손으로 가릴 수 없듯이 굴욕적인 과거의 흔적을 없앤다고 없어질 리 만무 저리 두고 그날을 되새김이 더 낫지 않겠나 싶습니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작가 김훈의 말입니다. 인조실록과 산성일기는 전쟁 중 오고 간 굴욕적인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낯 뜨거운 기록이며 인조가 간 길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그 기록을 토대로 굴욕의 흔적이 깃든 남한산성을 김훈이 자전거로 몇 날 며칠을 배회하며 채집한 기록이고, 내 약소한 조국의 수치스러운 기록을 글로서 읽을 수 없기에, 조선이 걸어온 수백 년의 길을 애써 거슬러 올라간 아픔의 기록입니다.

 

 

"풀리는 강을 강을 바라보면서 칸은 망월봉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조선 행국의 망궐례를 생각했다.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명을 향해 영신의 춤을 추던 조선 왕의 모습은 칸의 마음에 깊이 박혀들었다. ···난해한 나라로구나······. 아주 으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270쪽

칸의 마음에 김훈이 들어간 대목입니다. 전쟁이지만 전쟁이 아닌 강자가 약자를 향한 훈육(?)입니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칸인 홍타이지도 조선 임금인 인조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버티고 버팁니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가지 버티어야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93-94쪽"

 

 

영의정 김류(金류 1571-1648)는 화친에 반대했다가 살고자 전향을 한 인물로 기회주의적인 자입니다. 힘의 차이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버틸 수도 없는 현실인데 척사파 최명길은 맞서고 또 맞서길 바랍니다. 대항과 항복 사이에서 위악(僞惡)과 위선(僞善)의 말들이 서로 물어뜯다 결국 위악은 높이 치솟고 위선은 가라않습니다. 임금도 백성도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백성의 시체가 즐비한 상황에서 버티고 맞서다 임금이 죽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그 길을 모아 기록하면 역사가 됩니다. 인조가 살던 시간과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은 글로 축적되어 역사로 남았습니다. 역사는 사람이 쓰고 쓰는 이의 사관(史觀)에 따라 남기고 싶은 사건만 기록하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기에 불편한 남한산성의 기록이 온전하게 남음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책은 저자 김훈의 글을 쫓는 일련의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김훈의 시선이 그리고 글로서 세상과 다투지 않겠다는 그의 글이 시리도록 아름답습니다. 다만 김훈의 말과 임금의 말이 그리고 신하의 말과 무지렁이 백성의 말이 모두 다르지 않아 부자연스러움도 없지 않습니다.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를 아래에 옮기며 먹먹해진 가슴을 쓸어봅니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나 의 선대 황제 이래로 너희 군신이 준절하고 고매한 말로 나를 능멸하고 방자한 침월로 나를 적대함이 자심하였다. 이제 내가 군사를 이끌고 너의 담 밑에 당도하였는데, 네가 돌구멍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명을 아비로 섬겨, 나의 화포 앞에서 너의 아비에게 보이는 춤을 추더구나. 네가 지금 거꾸로 매달린 위난을 당해도 너의 아비가 너의 춤을 어여삐 여지기 않고 너를 구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

너 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쳐박혀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284쪽

 

★ 아래 접은 글은 『조선왕조실록』중에서 「인조실록」부분을 짧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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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명에서 청으로
1616년 ~ 1644년

1616년-광해8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부족을 합쳐 후금을 세우고 칸의 자리에 오르다.

1618년-광해 10년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다. 후금이 조선에 파병 철회를 요청하다.

1619년-광해 11년
강홍립이 일만 병력으로 명을 위해 출병했으나 후금에 투항하다.

1623년-인조 1년
능양군(인조)이 광해를 폐하고 왕위에 오르다.(인조반정)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남한산성 축성에 착수하다.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삼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 임금은 강화로 피난가다.(정묘호란)

1636년-인조 14년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용골대가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나,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다.
청군이 침입하여 임금과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난가다.(병자 호란)

1637년-인조 15년
인조, 삼전도에서 투항하고 세자 일행은 심양으로 끌려가다.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다.

1641년-인조 19년
척화신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가 투옥되다.

1642년 - 인조 20년
주화파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가 투옥되다.

1644년 - 인조 22년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하다.



남한산성, 겨울에서 봄으로
1636년 12월 14일~1637년 2월 2일

인조 14년(1636년) 병자 12월 14일(이하 모두 음력)
-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하기로 하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함께 빈궁을 강화도로 보내다.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강화를 청하여 진격을 늦추도록 하다. 임금이 수구문으로 나가 남한산성에 도착하다. 김류가 임금에게 강화도로 피할 것을 권하다.

12월 15일
- 임금이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향하다가 성으로 돌아오다.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전하다. 임금이 수어사 이시백의 청에 따라 제찰사 이하 모든 장수를 불러 유시하다. 눈이 많이 내리고 유성이 나타나다.

12월 16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성첩을 순시하고 사졸을 위로하다. 유성이 나타나다.

12월 17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류와 홍서붕이 강화를 청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회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12월 18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상헌, 장유, 윤휘를 비국당상으로 삼다.

12월 19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적병이 남벽에 육박하자 화포로 물리치다.

12월 20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오랑캐 사신 세 명이 성 밖에 도착하다. 임금이 각 도의 굼대를 선발해 적을 치게 하라고 명하다.

12월 21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신국, 이경직 등이 오랑캐 진영에서 돌아와 사정을 아뢰다.

12월 22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삼사가 주화를 내세운 사람을 참하도록 청하다.

12월 23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자모군 등이 출전하여 오십 명 가까운 적을 죽이다.

12월 24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를 치르다.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임금이 세자와 승지, 사관을 거느리고 날씨가 개기를 빌다.

12월 25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예조가 온조 사당에 제새를 지내자고 아뢰다.

12월 26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병사를 거느리고 검단산에 도착했으나 습격을 받고 패하다.

12월 27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이기남이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오랑캐 진영에 가지고 가서 전했으나 받지 않다.

12월 28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최명길이 강화에 대해 아뢰다. 선전관 민진익이 성 밖으로 나가 각지의 군중에 명을 전하고 돌아오다. 임금이 입은 옷을 벗어 그에게 내리다.

12월 29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진을 쳤는데 적이 싸우지 않다. 날이 저물 무렵 적이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 등 여덟 명이 죽고 사졸의 사상자도 매우 많다.

12월 30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간관이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


인조 15년(1637년) 정축 1월 1일
- 임금이 남한산성 행궁에 있다. 백관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다. 비국낭청 위산보를 파견하여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고 형세를 엿보게 했으나,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며 되돌려보내다. 일식이 있다. 삶은 고기와 찐 콩을 성첩의 장돌에게 내리도록 명하다.

1월 2일
- 홍서붕, 김진국, 이경직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칸의 글을 받아 오다. 이성구가 장유, 최명길, 이식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할 것을 청하다. 완풍부원군 이서가 군중에서 죽다.

1월 3일
- 동양위 신익성이 오랑캐의 글을 태워 버리자고 상소하다. 홍서붕. 김신국, 이경직 등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들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다.

1월 4일

- 김상헌이 "오랑캐에게 답서를 보내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한 뜻으로 싸우고 지키는 데 대비해야 한다"고 아뢰고, 사간 이명웅, 교리 윤집, 정언 김중일, 수찬 이상형 등이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아뢰다. 선전관 민진익이 여러 진의 근왕병들에게 조정의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여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 세 번이나 나갔다 들어오다.

1월 5일

- 자원 출전한 김사호가 성 밖을 순찰하다 도망하는 군사를 붙잡아 효시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광교산에 주둔하며 전황을 알리다.

1월 6일
- 함경 감사 민성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원도 금화현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들어오다. 사방에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다.

1월 7일

- 임금이 성첩을 지키는 장졸을 위로하다.

1월 8일

-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계책을 묻다. 관량사 나만갑이 남은 군량미가 이천팔백여 석이라고 아뢰다. 예조가 "날짜를 다시 받아 온조왕의 제사를 정성껏 치르자."고 청하다.

1월 9일
- 김류, 홍서붕,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 문서를 오랑캐 진영에 전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사신 파견을 반대하다.

1월 10일.

 

기록없음

1월 11일

- 해가 뜰 무렵, 임금이 원종대왕의 영정에 제사를 지내다. 김류, 홍서붕, 최명길 등이 글을 보낼 것을 굳이 청해 임금이 열람하고 고칠 곳을 묻다. 최명길이 문장의 자구를 고치다. 푸르고 흰 구름 한 가닥이 동방에서 일어나다.

1월 12일.

기록없음

1월 13일
- 홍서붕이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고 강화를 하자는 의견이 있다"고 하자 임금이 비밀리에 정명수에게 은 일천 냥을,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삼천 냥씩 주게 하다. 임금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고 장사들을 위로하다. 동풍이 크게 불다. 헌릉에 불이 나 사흘 동안 화염이 끊이지 않다.

1월 14일
-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다.

1월 15일
- 남병사 서우신과 함경 강사 민성휘가 군사를 합쳐 양근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이만 삼천이라고 일컬어지다. 평안도 별장이 팔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에 도착하다. 경상 좌병사 허완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에 도착했으나 싸우지도 못한 채 패하고, 우병사 민영을 싸우다가 죽었다. 충청 감사 정세규가 용인의 험천에 진을 쳤으나 패하여 생사를 모르다.

1월 16일

- 오랑캐가 '초항'이라는 두 글자를 기폭에 써서 보이다. 용골대가 홍서붕, 윤휘, 최명길에게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하다.

1월 17일
- 홍서붕 등이 무릎을 꿇고 칸의 글을 받아 돌아오다. 그 글에 "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보면 하늘이 자연 처분을 내릴 것"이라고 씌어있다.

1월 18일
- 임금이 적진에 보낼 문서를 읽고 최명길에게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하게 하다. 최명길이 수정한 글을 보고 예조판서 김상헌이 통곡하며 찢어버리고 "먼저 신을 죽이고 다시 깊이 생각하라"고 아뢰다. 김상헌의 말뜻이 간절하고 측은해 세자가 임금 곁에서 목 놓아 울다. 눈이 크게 오다.

1월 19일

-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다. 우상 이홍주와 최명길, 윤휘를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아 죽은 자가 생기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다. 정온이 문서에 '신'이라 언급한 것을 들어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을 만들려 한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린다.

1월 20일

- 대사헌 김수혀느 집의 채유후, 장령 임담, 황일호 등이 청대하여 "국서에 신이라고 일컬으면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된다."고 아뢰다. 최명길이 "늦추는 것은 빨리 일컫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다. 이홍주 등이 지난번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답서를 받아 오다. 그 글에 "그대가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화친을 배척한 신하 두세 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1월 21일
- 이홍주 등이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우리가 다스리도록 결재해 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들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다. 저녁에 용골대가 서문 밖에서 국서를 돌려주며 "그대 나라가 답한 것은 황제의 글 내용과 달라 받지 않는다"고 말하다.

1월 22일

- 최명길이 "다시 문서를 작성해 화답하자"고 아뢰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자수하도록 하다. 세자가 봉서를 비국에 보내어 "죽더라도 내가 성에게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화도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치다. 오랑캐 장수 구왕이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갑곶진에 주둔하면서 홍이포를 발사하자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접근하지 못하고,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화도로 건너오다. 전 우의정 김상용이 죽다.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유사와 부녀 중에 자결한 자와 굴복하지 않고 죽은 자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월 23일

- 김상헌이 적진에 나가가 죽게 해줄 것을 청하다. 밤중에 적이 서쪽에 육박하자 수어사 이시백이 힘을 다해 싸워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가다. 전 교리 윤집, 전 수찬 오달제가 척화신으로 오랑캐의 칼날을 받겠다고 상소하다.

1월 24일

- 적이 망월봉에서 발사한 포탄이 행궁으로 떨어지다.

1월 25일
-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고 성첩이 탄환에 맞아 허물어져 군사들이 마음이 흉흉하다. 용골대와 마무대가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진은 다시 오지 말라"고 하며 그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준다.

1월 26일
- 훈련도감의 장졸과 어영청의 군병이 대궐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청하다. 이때 처음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임금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삼사가 통곡하며 출성을 만류하자 임금이 "군정이 변했고 사태도 달라졌다. 나의 자부들이 모두 잡혔고 백관의 족속들도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혼자 산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보겠는가"라고 말하다.

1월 27일

- 이홍주, 김신국, 최명길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다. 그 글에서 "조지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하다.

1월 28일
- 문서를 거두어 모두 태우다. 정온이 칼로 스스로 배를 찌르고, 김상헌이 목을 맸으나 죽지 않다.

1월 29일
- 윤집, 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자 임금이 오열하며 술을 내리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 진영에 가다.

1월 30일
- 삼전도에서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다. 임금이 밭 한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리다 해질 무렵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다.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백관들이 앞 다투어 어의를 잡아 당기며 배에 오르다. 사로잡힌 부녀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다. 인정 떄가 되어 창경궁 양화당으로 들어가다.

2월 1일
- 몽고병들이 남한산성 안에 있었는데. 살림집이 대부분 불타고 시체가 길거리에 널리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임금에게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나와서 전송하라"고 요청하다. 왕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은 청나라 진중에 머물고 인평대군과 부인은 돌아오다.

2월 2일
- 칸이 삼전도에서 철군하자 임금이 전곶장에 나가 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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