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정민 지음/푸르메
다산(茶山)에 관련된 책은 쉬운 책 위주로 챙겨보는 편입니다. 이유는 다산의 후손이라는 점과 그러면서 다산(茶山)을 잘 모른다는 스스로의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이 책 《다산어록청상》도 그러한 이유로 재고 없이 선택한 책입니다.
먼저 이 책의 집필 배경에 대한 소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갔을 때, 이웃에서 우연히 반쪽자리 『퇴계집』을 얻었고, 매일 "새벽에 한 편 읽고 오전 내내 음미하다가 점심 먹고 나서 그 아래에 자신의 단상을 적었"는데 이렇게 하나하나 적어나간 글 묶음이 「도산사숙록」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저자인 정민 교수가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다산시문선』을 초록하여 책을 집필하고 남은 카드를 매일 하나씩 자신의 감상을 붙여 만든 정민의 「다산사숙록」입니다. '청상(淸賞)'은 '맑게 감상한다'는 의미입니다.
대다수의 잠언을 엮은 책이 그렇듯이 마음먹으면 몇 시간 안에 읽고 덮을 수 있지만 다산과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천천히 저작(咀嚼)하듯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간을 흐르고 어느덧 마음먹은 바 부해져 중반 부에서 잠시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적잖은 시간이 흘러 이렇게 한번을 읽고 돌아보니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붙여둔 작은 포스트잇이 꽤 됩니다. 그중에 가장 처음 표시해 둔 한 편을 소개겸 이곳에 옮겨봅니다.
부질없는 일
산에서 지내면서 일이 없어 사물의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부지런히 애를 쓰며 정신을 쏟고 애를 쓰며 정신을 쏟고 애를 태우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뿐이다. 누에가 껍질을 깨고 나오면 뽕잎이 먼저 싹튼다. 제비 새끼가 알에서 나오면 날벌레가 들판에 가득하다. 갓난아이가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면 어미의 젖이 분비된다. 하늘은 사물을 낼 때 그 양식도 함께 준다. 어찌 깊이 걱정하고 지나치게 근심하며 허둥지둥 다금하게 오직 잡을 기회를 놓칠까 염려할 것인가? 옷이란 몸을 가리면 되고, 양식은 배를 채우면 그뿐이다. 봄에는 보리타작 때까지 먹을 쌀이 있고, 여름에는 벼 익을 때까지 쓸 양식이 있다. 그만둘지어다. 올해 내년을 위한 꾀를 세워도 그때까지 살아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 자식을 어루만지며 손자와 증손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자손들은 모두 바보란 말인가?
- 「또 정수칠에게 주는 말」
사람들은 자꾸 반대로만 한다. 급히 할 것은 저만치 미뤄두고, 안급한 일은 허둥지둥 바삐 한다. 눈앞의 삶은 밀쳐두고 훗날의 계획만 세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흘려보낸다. 자손을 위한다며 제 삶을 망친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몫이다. 내가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내 밑둥이 썩어나가는 것은 못 보면서 백년의 계획만을 세우고 있으니 민망하고 안쓰럽다. 만족을 모르는 삶에 기쁨은 없다. 미래를 꿈꾸려거든 현재를 경영하라. 내일은 알 수가 없다. 자손은 내가 아니다.
23-24쪽
옮긴 글의 아래는 저자 정민이 다산의 글을 읽고 보탠 글입니다. 아등바등하며 앙앙불락했던 지난날들 결국 지나고 보면 다 부질없는 짓,, 산더미처럼 쌓인 일 앞에서 한숨만 쉬었더랍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모든 걱정은 눈 녹듯 다 사라졌지만 당시는 눈만 뜨면 걱정이었답니다.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일에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부쩍부쩍 자라는 아이와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역시나 한숨이란 놈은 잊지 않고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다산이 제자 정수칠(丁修七)에게 해준 말이 제게 작은 공감을 선물합니다. 이러한 공감은 제 마음 한 켠에 붙어서 조금씩 공고히 다져지고 언젠가 혜안으로 발현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잠언집의 매력입니다. 독자의 경험과 처한 상황에 따라 울림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이렇듯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날 때면 책값이 아깝지 않음을 느낍니다. 다만 저자가 보탠 감상이 재미를 더하기는 합니다만 이전에 다산 관련 책을 몇 권 읽은 독자라면 기시감에 조금은 신선함이 떨어지는 대목도 없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거가居家 치산治産 그리고 경제經濟에 관련 부분은 꽤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맑게 감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부족함도 많기에 앞으로도 종종 들춰보면서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