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 10점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민음사
https://sahngoh.tistory.com2014-01-10T15:19:000.31010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이성이 인성에 비례하지 않고 지식이 지성이 비례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불가의 가르침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이야기하고자 헤르만 헤세가 석가모니 싯다르타를 이야기합니다. 석가모니에 대해서 서양 사람이 얘기를 하다니 뭐 이젠 그래 놀라울 일도 아닙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말입니다. 일본 연구의 고전 《국화와 꽃》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라도 미국 사람이고, 고산자의 김정호도 세상 밖으로 밀려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볼 수 있었으니 어쩌면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 《싯다르타》는 여타 싯다르타를 다루는 책과는 조금 괘를 달리합니다. 더구나 어려운 불교용어도 찾아볼 수 없고 쉽게 읽힙니다.



 "헤세가 부처 석가모니의 전설에서 그의 이름 싯다르타와 줄거리의 세세한 부분, 그리고 해탈과정을 그대로 재현시키면서도 싯다르타의 세속 생활을 삽입하는 것은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과 실제적 삶 vita activa을 대비시키면서 인간 존재에 놓인 양극성, 즉 사유와 감각, 정신과 욕망의 배후에서 탐구되는 단일성이 어는 한쪽에 편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작품 해설에 적고 있습니다. 

어려운 해설이지만 헤세가 굳이 넣은 세속의 생활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속의 생활은 이성적 깨달음의 영역입니다. 아마 직접 경험하지 않고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서구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단적인 예로 전설의 동물 용(龍, dragon)을 표현하는 방법을 보면 동서양의 차이가 극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날개 있는 서양의 용은 이성의 산물이고 날개 없는 동양의 용은 감성의 산물입니다. 날개 없이 나는 용을 서양식 사고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헤세의 싯다르타는 우리와 좀 더 친근하니 아이러니합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카밀라를 만나 그녀한테서 사랑의 쾌락을 배웠으며, 카마스와미한테서는 장사하는 기술을 배웠으며, 돈을 모았으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으며, 나의 위(胃)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나의 관능적 감각들에 아첨하는 법을 배웠"기에 싯다르다는 한 때 범인과 다르지 않았고, 범인을 이해했으며 그 이해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보는 것 말입니다.









더구나 아들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깨달음을 눈앞에 둔 싯타르타에게 속세의 연이 이어져 아들에 대한 번뇌로 잠 못 이루게 되는데 성인으로 묘사된 뱃사공 바주데바와의 대화가 잔잔하게 마음을 울립니다.

도대체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당신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요?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훈계를 통해서 그럴 수 있다는 겁니까?


.......


바 주데바가 자기에게 하였던 말 가운데 자기 스스로가 이미 생각하여 보지 않았거나 알지 못하였던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그런 앎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앎보다도 자기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하였으며, 그러한 앎보다도 자기의 자식에 대한 정이, 자식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자기의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하였던 것이다. 167-177쪽


싯타르타는 집을 떠난 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커다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싯타르타는 바라문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상처와 똑같은 고통을 받았을 아버지를 생각하자 다람쥐 챗바퀴를 돌듯 숙명적인 순환과도 같은 윤회를 깨우치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석가모니가 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감에 해세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문득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돌고 도는 인생 말이죠..^^




이 책을 통해서 헤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도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서두에 친구 고빈다에게 한 말처럼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그러한 헤세의 의지가 싯타르타에게 속세의 삶을 선물해 완성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경험 없는 지식과 가르침을 경계한다고 말이죠.


네 맞습니다.

책에 코를 쳐 박는다고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듣고 또 듣는다고 해서 그 깨달음이 얻어지겠습니까?





Backuped From
https://sahngoh.tistory.com/538
2014년 1월 11일에 작성된 글로 블로그 통합으로 이전된 글입니다.


HI!! 궁금한 점은 댓글로 문의주세요~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9.04.11 20:3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싯다르타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책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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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